지난 글이 사케에 입덕하게 된 계기였다면 이번에는 본격적으로 사케가 좋아진 이유 몇 가지에 대해 얘기해보려고 한다.
1. 페어링
사케가 좋아진 가장 큰 이유는 내가 좋아하는 한, 중, 일 아시안 음식과 페어링이 쉽다는 점이었다. 맥주와 칵테일을 팔 때 가장 괴로웠던 것이 페어링이었거든. 나는 술을 마실 때 안주를 함께 곁들이는 것을 좋아하는데 말이지…

향이 풍부한 에일 종류는 주로 양식과 어울렸는데, 문제는 내가 양식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IPA가 좋다고 맨날 치즈 버거에 햄버거 먹을 수는 없는 노릇이고, 스타우트 좋아한다고 매번 굴이랑 초콜렛 음식 먹을 수는 없잖아요🤷🏻♂️
칵테일도 마찬가지였다. 하이볼과 몇몇 롱 드링크 계열 음료를 제외하면 대부분 안주 없이 마시는 것이 더 좋았다. (그래서 내가 칵테일 책을 쓸 때 힘들었나? 갑작스런 깨달음)
사케는 편했다. 맛이 짙은 안주나 국물 요리에는 쌀의 감칠맛이 푸근한 준마이, 사시미 또는 해산물 류는 깔끔한 준마이 긴죠, 매운 맛의 음식에는 카라구치*한 사케를 매치하니 안주도 술도 술술 들어갔다. 이것저것 다 귀찮을 땐 밸런스 형 사케를 매치하면 무난하게 어우러졌다. 페어링이 이렇게 쉬운 것이었구나?
*카라구치(から口): 깔끔하고 드라이한 맛의 술을 이야기할 때 주로 쓰는 단어.

2. 다양한 온도와 맛의 변화를 즐기는 술
사케의 또 다른 매력은 다양한 온도에서 즐길 수 있다는 것이다. 영하에 가까운 쨍하게 차가운 온도부터 시작해, 자연스럽게 온도를 올려마시다가, 중탕해서 뜨끈하게 즐기기도 한다*. 온도가 바뀔 때마다 술의 맛과 향도 조금씩 변해가는데 그 재미가 좋았다. 호감가는 친구의 새로운 장점 혹은 단점을 알아가는 느낌 같았달까.
*모든 사케를 데워마시진 않는다. 요즘 유행하는 프루티한 향의 사케는 주로 차갑게 마시는 것이 권장되는 편. 물론 데워먹어도 상관은 없다.
비슷하지만 다른 얘기로 하루 만에 다 비우지 않고 며칠에 걸쳐 맛의 변화를 즐기는 것도 재미졌다. 적당히 맛본 뒤, 진공 마개로 잘 막아두고 짧게는 일주일 - 길게는 2~3주 정도 놓고 찬찬히 맛의 변화를 즐기곤 한다. 어떤 술은 막 땄을 때가 가장 맛있었고 또 어떤 술은 일주일 넘었을 때가 더 맛있어지기도 했다.

이렇게 마시니 여러 술을 비교해가며 마실 수 있었다. 애지중지한답시고, 따는 순간 다 마셔야해! 강박을 가졌던 때도 있었는데, 천천히 두고 마시는 것이 습관이 되니 여러 병을 따서 비교해가며 마실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글을 읽는 애주가 분이라면 다들 알겠지만 술은 비교해서 마실 때가 제일 즐겁다. 안그래도 우리나라에서 사케 마시기 비싼데... 허겁지겁 완병하기보다, 여유롭게 즐겨보길 추천한다.
이렇게 집에서도 애지중지 술을 마셔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간혹 시음회에서 10ml 정도 밖에 안 되는 술을 시음하고 “아 난 그 술 별로던데?” 라고 쉽게 이야기하는 사람을 볼때면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오지랖이 차오른다.

“한병을 씹고 뜯고 맛봐도 잘 모르겠는데 10ml 마시고 어떻게 알어…?”
꼰대같은 잔소리가 목 끝까지 차오르지만… 그랬다간 이상한 사람 취급당했겠지. 이미 이상한 사람 같다고 생각했다면 사실 그것도 맞다.
3. 나마자케의 매력
생맥주, 생막걸리… 나만 그런건지 몰라도 술 앞에 생이 붙으면 유독 맛있게 느껴진다.
사케에도 생이 있는데, 생 사케(生酒) 일본어로 나마자케는 말 그대로 生 즉 열처리를 하지 않은 사케를 의미한다. (시중의 일반 사케들은 보관의 편의와 맛의 일관성을 위해 두번의 열처리를 거치는데, 이 과정을 생략한 것.)
나마자케는 열처리를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프레쉬함과 미탄산(!!), 소다, 흰꽃, 청사과와 같은 특유의 향(生香)을 맡을 수 있는데…
처음 마셨던 나마자케의 인상과 감동이 아직도 또렷하다.
입에 처음 들어올 때는 은근한 풀향이 먼저 느껴지고 매력적인 산미, 프루티한 단맛, 미탄산이 차례로 흐른다. 당도가 꽤 있고 바디감이 꽤 느껴지는데, 쨍하게 차갑게 마시니 차가운 온도감과 실키한 질감의 대비가 너무 재밌다.
글만 읽어도 그때의 그 맛과 감동이 떠오르는데… 이 술은 “미와타리 시보리타테”라는 사케로, 대학로의 니혼사케에서 구할 수 있다.

지난 글에서 소개했던 나베시마 히야오로시가 입덕 사케였다면 “미와타리 시보리타테”는 본격 입문 사케라고 할 수 있겠다. 가격도 삼만원 대로, 평균 4~5만원 대가 많은 사케씬에서 꽤 리즈너블한 가격이니 나마자케가 궁금하신 분이라면 꼭 한번 마셔보길 추천한다.
4. 적은 재료로 만들어내는 다채로운 스펙트럼
내가 맥주에 빠졌던 큰 이유 중 하나로 한정된 재료로 다양한 스펙트럼의 맛을 만들어낸다는 점이 있었다.
청포도, 사과, 후추, 바나나, 커피, 초콜렛, 꿀, 레몬, 열대과일… 이처럼 다양한 향미를 보리, 홉, 효모, 물이라는 4가지 재료*로 만들어낼 수 있다는 점이 너무나 경이로웠다.
*책을 낸 이후로 4가지 재료 외에 다양한 부재료를 넣는 맥주들이 많이 등장했는데, 맛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손이 안 갔다.
그런데 사케도 똑같았다! 쌀, 누룩, 효모, 물이 전부인데 맛의 스펙트럼이 정말 다양했다.
배, 바나나, 리치, 청사과, 샤인머스캣, 캬라멜, 말린 버섯, 요거트, 간장, 멜론, 튀밥, 파인애플, 흰꽃, 소다, 꽃, 카카오, 곡물 껍질, 캬라멜, 풀 등…
비슷한 듯 다른 수십가지 향이 얽히고, 산미와 질감, 숙성이라는 변수들이 섞여 상상치 못했던 다채로운 스펙트럼을 만들어냈다.

맥주처럼 볶는 것도 아니고, 홉처럼 풍부한 향을 재료를 넣는 것도 아니고, 포도처럼 자체적으로 당을 가진 재료도 아닌데 양조기술로 이렇게 다양한 스펙트럼을 만들어낼 수 있다니. 이제야 알게 된 것이 아쉬우면서도, 동시에 여러 술을 거쳐 지금 만났기 때문에 이렇게 좋아하게 될 수 있게 되었구나, 생각이 함께 들었다.
이외에도
- 집앞까지 배달해주는 직구의 매력
- 미개척지(?)를 도전하는 개척자의 마음
- 기대 못했던 맛있는 술을 우연히 발견하는 로또의 마음
- 마셔도 마셔도 끝이 없던 와인, 위스키와 다르게 감당 가능한 가격 제한선
- 지역적 차별화와 양조장의 스토리
등이 생각나는대 더 적자니 글이 너무 길어지는 것 같아 여기서 급 마무리해보려고 한다. 앞으로 또 자주 쓸 거니까요.
조만간 사케는 메이저는 못 될거야 라는 글로 돌아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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