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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셨다/니혼슈 탐구생활

나는 어쩌다가 사케에 미친 사람이 되어버렸나 #1

사케에 본격적으로 관심이 싹트기 시작한 것은 코로나 바이러스가 한창이던 2021년 초. 그토록 좋아했던 위스키에 대한 관심이 시들어지던 시점과 겹쳐있다. 20대 후반과 30대 초반에 걸쳐 가장 좋아했던 술이 위스키였는데, 어느 순간 좋아했다고 말하기가 무색할 정도로 급격하게 사랑이 식어버렸다.

이유야 여럿이지만 가장 큰 이유는 매니아가 너무 많아졌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인스타그램과 유튜브에 위스키 랭킹을 줄 세우는 사람이 수십, 수백명이 생겨나고, 특정 위스키가 출시되면 며칠 전부터 캠핑을 하고, 불법임에도 불구하고 프리미엄을 붙여 되파는 행위가 암암리에 성행하고, 고숙성 원액이 부족하다며 라벨과 맛을 바꿔버리지만 가격은 올리는 몇몇 위스키를 보고있자니, “아, 나까지 저 저 유난에 끼고 싶지 않다.” 는 생각이 확 올라와버린 것이다.

물론 맛있는 위스키는 종종 찾아묵습니다.


책을 내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다! 라고 생각했던 두 술(맥주와 위스키)에 대한 애정은 아이러니하게도 너무 많은 사람들이 찾기 시작하자 휘리릭 식어버렸다. 한 친구가 나보고 “술 홍대병 말기“라고 놀린 적이 있었다.
당시에는 기분 나쁘다고 생각했었는데, 이제와 생각해보니 맞는 말 같기도 하다. “그래도 진짜 홍대병은 나만 알아야 돼!! 하다가 떠나가지만… 나는 열심히 알리고, 사랑을 전시하고 다녔다는 게 다르지 않니?”

나의 증상을 꿰뚫어본 친구에게 이렇게 변명하고 싶다.

내추럴도 한참 마셔보고
럼도 열심히 마셨으나…


그나저나 이젠 뭘 마시고 사나(?) 싶어 내추럴 와인과 컨벤셔널 와인, 럼, 소츄 등을 기웃거려 봤지만 생각만큼 잘 꽂히지 않았다. 주변의 선배 애주가 분의 말을 들어보니, 그토록 술, 술 노래 부르던 사람들도 어느 순간 확 흥미가 사라질 때가 온다던데. 나에게도 그런 때가 왔나보다 - 싶어 수도승처럼 지내려던 차, 벼락처럼 한 사케를 만났다.

나베시마 하베스트 문


나를 불구덩이와 같은 사케의 세계로 이끈 술은 [나베시마 하베스트 문] 이라는 제품이었다. 겨울에 완성한 사케를 반년 동안 냉장숙성시킨 뒤 이듬해 가을 시즌에 내놓는, 일명 “히야오로시ひやおろし“에 해당하는 한정 사케.

평소에 “한정”, “숙성”, “제철” 이런 거에 환장하는 사람인데 세 가지가 다 있네? 게다가 라벨은 지금까지 봐왔던 한자 범벅 사케들과 다르게 심플하고 깔끔하여, (구)디자인 전공자의 심금까지 울려버린 것이다.

가을 느낌 물씬- 지금 봐도 예쁘다.


“그렇게 대단한 맛이야?”

라고 물어본다면 그건 아니었다. 위스키를 제외하고 한 병에 10만원 이상의 돈을 지불한 적이 없었는데. 한정판이고 좋은 날(?)이었기에 12만원이라는 거금을 지불했지만 솔직히 고백하자면 12만원 만큼의 맛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궁금했다.

히야오로시란 다 이런 맛일까? 나베시마는 원래 이런 술을 만드는 것일까, 아니면 한정이라 이런 맛일까? 다른 한정 사케는 또 없을까? 사케란 일본에서도 비싼 술일까?

등등. 궁금증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쏟아지기 시작했다. 원래 덕질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한번에 꽂히는 것보다 평범했지만 돌아서면 궁금해지는 순간이라던데. 그 상황이 나에게 닥친 것이다.

그 날 이후 각종 시음회, 사케 페스티벌, 직구, 일본 여행을 거치며 본격적으로 사케를 마시기 시작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 덧 400 종 이상의 사케를 마신 사람이 되었는데…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일본에서 생산되는 사케의 종류가 2만 종류는 될 거라고 하더라. 이렇게나 최선을 다해 마셨는데도 아직 도전해야할 술과, 알아야할 양조장이 많다는 것에 상상만 해도 즐겁고 간, 아니 가슴이 떨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