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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셨다/니혼슈 탐구생활

새로운 사케를 잔뜩 발굴한, 사카비토 시음회

 

올해, 나를 사케에 푹 빠지게 만든 일등공신 플레이스 중 한 곳인 사카비토에서 시음 이벤트를 한다고 하여 다녀왔다.

수입사 사칸도에서 운영하는 사카비토는 평소 맛있고 흥미로운 사케를 잔 단위로 팔고, 타치노미인 점이 좋아서 종종 방문하는 곳. @sakabito_sake


이 날은 평소보다 더 많은 종류의 사케를 잔으로 마실 수 있다고 해서 안 갈 수가 없었다. 심지어 가격도 도매가!!🥹

사진은 다 못 찍었지만 기대보다 훨씬 많은 종류의 사케가 1,2층에 걸쳐 세팅되어 있었다. 어떤 사케들이 있는지 한번 쭉 돌아본 뒤 마실 사케를 골랐다.

입장비 30,000에 요로코롬 칩을 받아서 사케를 마실 수 있다.

좋은 술은 어떤 음식과 매치하는지, 어떤 온도에 마시는지, 어떤 컨디션에 마시는지에 따라 매번 맛이 달라지기 때문에 한 잔 마시는 것으로 평가하는 것은 늘 조심스럽다.

그렇지만 안 적으면 아예 잊어버리니 정보 공유 및 잊지 않기 차원으로 기록해둔다.

하나아비 준마이 다이긴죠 후쿠로쯔리 빈카코이 무로카겐슈 / 핫탄니시키 / 정미보합 48% / 16.7도 / 그외 비공개 / 1회 열처리

첫 잔은 하나아비.

아는 사람은 다 아는 브랜드이자, 사케타임 랭킹 탑 10안에 꾸준히 드는 유명한 브랜드이다. 지금보다 사케를 잘 모르던 시절, 일본에서도 구하기 힘들다는 하나아비가 국내 소매점에서 판매되는 걸 보고 눈이 똥그래져서, “네임드 사케 한 병 쯤은 마셔봐야하는 것 아냐?” 의 마음으로 구입한 적 있었는데, 명성+ 가격 대비 아쉬워서 깜짝 놀랐던 기억이 있다. 아무튼.
하나아비가 귀한 술인 것은 확실하고... 그 사이 나도 다른 사케 수십 종을 마셔 입도 까졌으니 이제는 하나아비의 진가를 알려나? 싶어 재도전 해봤는데.

으음. 여전히 이 술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 고량주의 농향(연태고량st)스러운 파인 향과 은은한 사과향. 뭔가 향이 더 퍼져야 될 것 같은데, 향이 나다가 막혀버린 것 같은, 애매한 느낌? 물을 타지 않은 원주라 그런지 알코올 향도 꽤 올라오는데 알코올이 유독 도드라지는 느낌이다. 쌉싸래하게 남는 끝맛도 존재감이 꽤 강해서 술만 마시기엔 영 부담스러웠다🥲

이와시미즈 주피터 수프레스 무로카나마겐슈 / 사케이니시키, 히토고코치 / 13.1도 / 그외 비공개

진희가 고른 이와시미즈. 이와시미즈는 부부 둘이서 연간 4000병 정도의 술만 만드는 일본에서 가장 작은 양조장인데, 모든 술을 출품주의 퀄리티로 만드는 것으로 유명하다.

오늘 마시는 술은 이와시미즈 양조장의 여러 시리즈 중 행성 시리즈에 속하는 주피터. 라벨을 보면 왠지 세일러문이 생각난다.

행성 시리즈는 “일본과 세계를 초월하여 우주와 같은 무한대의 맛과 개성을 찾는다”는 모토로 출시하는 제품들이라고. 안 그래도 작은 양조장에서 2년에 한 번씩 출시하는 귀한 술이다.

달달상쾌한 갈아만든 배 + 은근한 곡물의 향이 복합적으로 나는데, 한 모금 마시면 우와 싶을 정도로 강력한 탄산과 산미가 몰아치고 식혜, 불린 쌀 같은 곡물의 맛이 확 났다가 드라이하게 사라진 뒤 귤피 같은 쌉싸래한 맛을 남긴다.

맛있었으나 웅장한 소개글이 기대감을 너무 올렸던지라, 그 정돈가? 생각이 안 들 수는 없었다. 세계를 넘어 우주까지 언급하길래 너무 기대했네요😅 여튼 맛은 좋았다.

츠시마야가이덴 데아 파터 라인 페를바인 준마이 무로카나마겐슈 / 미야마니시키 / 정미보합 60% / 11.1도 / 주도 -25.3 / 산도 3.8

여지껏 본 사케 중 가장 긴 이름의 술이다.

츠시마야 양조장의 술로 독일 화이트 와인 효모로 만든 여름 스파클링 사케라고 한다.

멋진 일러스트가 그려진 라벨과 병 색깔, 여름 스파클링이라는 말이 좋아서 언젠가 마셔봐야지~ 생각하고 있었는데 드디어 마셔본다.

한 모금 마시고 든 생각은, “막걸리?”

탄산이 강력한 모 프리미엄 막걸리에서 느꼈던 전통적인(?) 맛이 났다. 강력한 탄산감과 산미가 정말 인상적이었는데, 탄산이 지나간 뒤 쌀을 오물오물 씹었을 때 날 법한 곡물의 단맛이 살짝 왔다가 자연스럽게 사라지고 드라이하게 끝난다. 수입사 소개글에선 감귤류의 단맛이 난다고 했는데 이 날은 그런 뉘앙스를 못 느꼈다.

확실히 여름에 잘 어울릴 것 같은 맛. 그러나 내 취향은 아니었다. 주도 -25.3 (안 달다는 뜻)을 확인했어야 했는데 라벨에 깜박 넘어가서 그만^^

센사이 르네상스 야마다니시키 나마겐슈 / 정미보합 80% / 16.1도 / 주도 +1 / 산도 2.1 / 아미노산 1.7 / 효모, 유산 무첨가

당연한 이야기지만 와인에도 내추럴이 있듯 사케에도 내추럴 방식으로 만드는 술이 있다. 아니, 많다.

처음 보는 라벨, 처음 들어보는 양조장이었지만 쌀을 최소한으로 깎고 효모와 유산도 첨가하지 않은데다가 나무통에서 숙성하는 등 에도시대의 양조방식을 그대로 재현하여 빚은 사케라고 해서 도전해봤다.

야마다니시키로 만든 사케를 마실 때 많이 느꼈던 프루티한 향이 낮게 깔려있고, 목통 숙성답게 은은한 나무향이 난다. 한 모금 마시면 풀 향이 강하게 나는데 푸릇푸릇하다 못해 뭔가 틉틉한 맛이 입 안에 남았다. 마실 때마다 향이 계속 달라지는 느낌. 그러나 긍정적인 방향의 맛과 향은 아니었다.

사케 좋아하는 사람들과 한 병 사서 온도 별로 비교해보고, 이것저것 얘기하며 마셔보고 싶은 흥미로운 술이었으나... 맛만 놓고 보면 솔직히 내 취향이 아니었고 뭐랑 어울릴지도 잘 그려지지 않았다.

시노미네 링링 준마이긴죠 나카도리 무로카나마겐슈 / 정미보합 60% / 16도 / 주도 +7 / 산도 2.1 / 아미노산 1.1 / 협회9호 효모


빈 속에 너무 안 마셔본 술만 도전을 해서 그런지 좀 힘들었다. 심지어 4개 중 3개가 내 취향이 아니어서... 아는 맛, 내가 좋아하는 맛이 응급으로 필요했다.

그렇지만 오늘 같은 특별한 날, 너무 또 아는 맛은 아쉬우니까(ㅠㅠ이것도 병인 듯) 아는 브랜드에서 새로운 술을 마셔보는 것으로 타협하여 고른 시노미네.

시노미네는 3종 정도 마셔본 것 같은데 여지껏 한 번도 실패한 적 없어서 항상 믿고 마시는 편이다.
이 친구도 맛있었다. 팡팡 터지는 향까진 아닌, 절제된 향이지만 맛보면 청포도스러운 향과 단맛이 입 안에 퍼진 뒤 깔끔하게 끝난다. 좋았다. 역시 믿고 마시는 시노미네.

맛있어서 홀라당 비워버리는 바람에 디테일하게 적진 못 했지만 다음엔 보틀을 사서 제대로 마셔보려고 한다.

맛있었으니까 한 장 더 올려본다. 기억하세요 시노미네.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짤막 사케 상식~
사케는 술을 짜낼 때, 술이 나오는 순서에 따라 아라바시리, 나카도리, 세메 라고 부른다. 
가장 밸런스가 좋은 비싼 술이 중간 부분인 나카도리なかどり이기 때문에 이 부분을 사용한 술은 꽤나 고급으로 인정받으며, 사케 이름 뒤에 자주 붙어 있다. 그러니 나카도리 = 좋은 거 정도로만 기억해두면 사케 고를 때 편리하다.

시노미네를 양조하는 치요 주조는 나카도리만 담아서 “시노미네”로 판매하고, 아라바시리와 세메를 블렌딩해 “치요”라는 지역 브랜드로 출품한다고 한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치요도 마셔보고 싶다.

츠시마야 오마치 매니아 준마이다이긴죠 무로카나마겐슈 / 오마치 / 정미보합 50% / 16.9도 / 주도 -1 / 산도 1.4 / 아미노산 0.8 / 협회9호 효모

사카비토에 일하시는 일본인 직원분께 추천받아 도전한 츠시마야의 오마치 매니아. 세번째로 소개했었던 라벨 예쁜 술 만든 바로 그 양조장이다. 오카야마 산 오마치를 사용했고, 오마치를 좋아하는 양조가들과 애주가들을 향한 애정을 담아 오마치 매니아라고 이름지었다고 한다.

얼마 전 리뷰했던 카모니시키도 오마치였었는데. 안 그래도 요즘 오마치로 만든 술이 좋아지던 차였기에 딱 나 먹으라고 나온 술이구나~~ 싶어서 바로 주문했다. 사실 이 때부터는 조금 알코올이 올라와서 리뷰가 짧은데 오마치 매니아에 대한 리뷰는 특히 성의가 없고 짧다.

 

농축 그 자체, 미쳤네 라고만 적어뒀더라.

 

진희랑 "맛있다 맛있다"를 외쳐가며 서로 등 뚜들기면서 마셨다. 이 날 원래 술 살 생각은 없는데 오마치 매니아는 안 살 수가 없는 맛이어서 바로 샀다. 이 정도면 말 다했죠?

맛있었으니 한 장 더

같은 양조장에서 만든 술인데, 독일 효모 사케랑 이렇게 맛이 다를 일인지. 양조장의 한 가지 술이 맛없다고 해서 다른 술이 맛없으리라는 보장도 없구나. 싶었다.

다이나가와 텐카 스시라벨, 아키타사케코마치 준마이 다이긴죠 / 무로카나마겐슈 / 정미보합 45% / 15.3도 / 주도 -17 / 산도 1.8 / 아미노산 1.3 / 양조장 자연효모 D-29

이 후로는 계속 추천받아가며 마셨다.
다음으로 추천받은 술은 다이나가와 양조장의 “텐카” 시리즈.

 

라벨에 스시가 그려져있길래, 아 스시랑 먹으라는 것이구나 라고 생각했는데,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양조장 대표를 비롯해 누구나 좋아하는 최고급 마구로 스시를 라벨에 그려, 이 제품이 다이나가와의 최고급 제품이라는 것을 표현했다고.

 

에?

의식의 흐름이... 그렇게 전게된다고? 아무도 그렇게 생각 안 할 것 같은데

디자인은 뭐 그렇다치고... 수입사 소개글에 따르면 스시 라벨이 다이나가와 양조장의 4번 타자 급의 프리미엄 사케라는데

오. 라벨은 별로인데 엄청 맛있다!!
그야말로 쥬시함 그 자체. 매끄러운 질감도 훌륭했다. 시음기록을 찾아보니 “존맛. 쥬시 그 자체.” 라고만 딸랑 적어뒀다. 이상한 라벨로 기대감을 죽이고 맛을 돋보이려는 디자이너의 의도였다면 확실히 성공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디자인 진짜

하트라벨 이 친구도 맛있다고 한다. 하트를 그린 이유는 텐카 브랜드의 가장 중심적인 의미라는 뜻이라고. 

아 예... 설명을 읽어야만 의미를 깨달을 수 있는 특유의 디자인이 좀 아쉬웠지만 맛은 좋았으니까.
넘어가도록 하자.

사실 스시 라벨까지 마시고 코인은 다 떨어졌는데, 별로 기대하지 않았던 스시 사케가 좋았던 관계로 기분이 들떠서 추가로 코인을 구입했다.

9, 10월 사카비토에서 판매율 1위라는 마노츠루 다이긴죠. 종이를 찢어서 붙인 것 같은 라벨과 붓글씨가 멋지다.

마노츠루는 세계 농업유산으로 등재된 니가타의 사도 섬에 위치한 양조장으로, 친환경 비료로 재배한 쌀을 사용하는 것이 특징이라고 한다.

마노츠루 다이긴죠 무로카나마겐슈 / 고햐쿠만고쿠 / 정미보합 50% / 18.5도 / 주도 +3 / 산도 1.2 / 아미노산 1.3 / 1801호 효모

맛있다. 괜히 1위가 아니구나- 싶은 맛. 주도가 +3으로, 야야카라구치(약간 드라이한 맛) 계열로 분류된다고 하는데, 나마자케인데다가 바디감이 풍부해서인지 달게 느껴졌다. 함께 마신 진희는 드라이하게 느껴졌다고.

달큰한 쌀맛과 은은한 프루티함이 잘 어우러진 맛인데 감칠맛도 좋아서 음식이랑 먹으면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이 날 마셨던 여러 술 중 가장 쌀맛이 풍부하게 느껴졌던 술.

맛있었으니 한 장 더.

같은 브랜드의 초카라구치 버전과 준마이 다이긴죠 버전도 있다던데 다음에 기회가 되면 마셔보는 것으로.

신카이 사이죠지코미 무로카나마겐슈 / 야마다니시키 / 정미보합 70% / 16.5도 / 주도 -30 / 산도 2.6 / 협회9호 효모

이 날의 마지막 술.
귀양주(키죠슈)인만큼 마지막 술로 딱이지 싶어 골랐다. 귀양주란 사케를 빚을 때 사용하는 물의 일부를 사케로 대체하여 양조한 술을 의미한다. 대체로 진하고 단맛이 많다.

지금까지 4종류의 귀양주를 마셔봤는데 다 취향이었기 때문에 모르는 브랜드였지만 자신있게 주문했다.

역시나 맛있었다.
이 날 마셨던 술 중 단맛이 가장 풍부했는데 캬라멜 맛이 대놓고 느껴져서 정말 신기했다.
엿 같은 (욕 아님) 맛도 나고, 추억의 스카치 캔디 중 녹색 버전의 맛도 느껴진다.

우와 우와 거리다가 한 잔을 홀라당 비워버렸고...
돌아가는 길에 보틀을 주문할 수 밖에 없었다. 술잘알 친구가 놀러오면 디저트로 같이 마셔야지.


빈속에 생수를 안주 삼아 깡술로 보낸 두 시간이었고, 끝나자마자 국밥 갈기러 뛰어갔지만 정말 만족스러운 시간이었다.

평일이고 워낙 멀어서 갈까말까 고민이 많았었는데 아주 제대로 즐겼지 뭐야. 모르는 브랜드의 사케를 많이 알게 된 것도 즐거웠고 한결같은 내 취향을 확실히 알게 된 것 역시 좋았다.

오늘의 리뷰 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