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나를 사케에 푹 빠지게 만든 일등공신 플레이스 중 한 곳인 사카비토에서 시음 이벤트를 한다고 하여 다녀왔다.
수입사 사칸도에서 운영하는 사카비토는 평소 맛있고 흥미로운 사케를 잔 단위로 팔고, 타치노미인 점이 좋아서 종종 방문하는 곳. @sakabito_sake
이 날은 평소보다 더 많은 종류의 사케를 잔으로 마실 수 있다고 해서 안 갈 수가 없었다. 심지어 가격도 도매가!!🥹
사진은 다 못 찍었지만 기대보다 훨씬 많은 종류의 사케가 1,2층에 걸쳐 세팅되어 있었다. 어떤 사케들이 있는지 한번 쭉 돌아본 뒤 마실 사케를 골랐다.
입장비 30,000에 요로코롬 칩을 받아서 사케를 마실 수 있다.
좋은 술은 어떤 음식과 매치하는지, 어떤 온도에 마시는지, 어떤 컨디션에 마시는지에 따라 매번 맛이 달라지기 때문에 한 잔 마시는 것으로 평가하는 것은 늘 조심스럽다.
그렇지만 안 적으면 아예 잊어버리니 정보 공유 및 잊지 않기 차원으로 기록해둔다.
첫 잔은 하나아비.
아는 사람은 다 아는 브랜드이자, 사케타임 랭킹 탑 10안에 꾸준히 드는 유명한 브랜드이다. 지금보다 사케를 잘 모르던 시절, 일본에서도 구하기 힘들다는 하나아비가 국내 소매점에서 판매되는 걸 보고 눈이 똥그래져서, “네임드 사케 한 병 쯤은 마셔봐야하는 것 아냐?” 의 마음으로 구입한 적 있었는데, 명성+ 가격 대비 아쉬워서 깜짝 놀랐던 기억이 있다. 아무튼.
하나아비가 귀한 술인 것은 확실하고... 그 사이 나도 다른 사케 수십 종을 마셔 입도 까졌으니 이제는 하나아비의 진가를 알려나? 싶어 재도전 해봤는데.
으음. 여전히 이 술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 고량주의 농향(연태고량st)스러운 파인 향과 은은한 사과향. 뭔가 향이 더 퍼져야 될 것 같은데, 향이 나다가 막혀버린 것 같은, 애매한 느낌? 물을 타지 않은 원주라 그런지 알코올 향도 꽤 올라오는데 알코올이 유독 도드라지는 느낌이다. 쌉싸래하게 남는 끝맛도 존재감이 꽤 강해서 술만 마시기엔 영 부담스러웠다🥲
진희가 고른 이와시미즈. 이와시미즈는 부부 둘이서 연간 4000병 정도의 술만 만드는 일본에서 가장 작은 양조장인데, 모든 술을 출품주의 퀄리티로 만드는 것으로 유명하다.
오늘 마시는 술은 이와시미즈 양조장의 여러 시리즈 중 행성 시리즈에 속하는 주피터. 라벨을 보면 왠지 세일러문이 생각난다.
행성 시리즈는 “일본과 세계를 초월하여 우주와 같은 무한대의 맛과 개성을 찾는다”는 모토로 출시하는 제품들이라고. 안 그래도 작은 양조장에서 2년에 한 번씩 출시하는 귀한 술이다.
달달상쾌한 갈아만든 배 + 은근한 곡물의 향이 복합적으로 나는데, 한 모금 마시면 우와 싶을 정도로 강력한 탄산과 산미가 몰아치고 식혜, 불린 쌀 같은 곡물의 맛이 확 났다가 드라이하게 사라진 뒤 귤피 같은 쌉싸래한 맛을 남긴다.
맛있었으나 웅장한 소개글이 기대감을 너무 올렸던지라, 그 정돈가? 생각이 안 들 수는 없었다. 세계를 넘어 우주까지 언급하길래 너무 기대했네요😅 여튼 맛은 좋았다.
여지껏 본 사케 중 가장 긴 이름의 술이다.
츠시마야 양조장의 술로 독일 화이트 와인 효모로 만든 여름 스파클링 사케라고 한다.
멋진 일러스트가 그려진 라벨과 병 색깔, 여름 스파클링이라는 말이 좋아서 언젠가 마셔봐야지~ 생각하고 있었는데 드디어 마셔본다.
한 모금 마시고 든 생각은, “막걸리?”
탄산이 강력한 모 프리미엄 막걸리에서 느꼈던 전통적인(?) 맛이 났다. 강력한 탄산감과 산미가 정말 인상적이었는데, 탄산이 지나간 뒤 쌀을 오물오물 씹었을 때 날 법한 곡물의 단맛이 살짝 왔다가 자연스럽게 사라지고 드라이하게 끝난다. 수입사 소개글에선 감귤류의 단맛이 난다고 했는데 이 날은 그런 뉘앙스를 못 느꼈다.
확실히 여름에 잘 어울릴 것 같은 맛. 그러나 내 취향은 아니었다. 주도 -25.3 (안 달다는 뜻)을 확인했어야 했는데 라벨에 깜박 넘어가서 그만^^
당연한 이야기지만 와인에도 내추럴이 있듯 사케에도 내추럴 방식으로 만드는 술이 있다. 아니, 많다.
처음 보는 라벨, 처음 들어보는 양조장이었지만 쌀을 최소한으로 깎고 효모와 유산도 첨가하지 않은데다가 나무통에서 숙성하는 등 에도시대의 양조방식을 그대로 재현하여 빚은 사케라고 해서 도전해봤다.
야마다니시키로 만든 사케를 마실 때 많이 느꼈던 프루티한 향이 낮게 깔려있고, 목통 숙성답게 은은한 나무향이 난다. 한 모금 마시면 풀 향이 강하게 나는데 푸릇푸릇하다 못해 뭔가 틉틉한 맛이 입 안에 남았다. 마실 때마다 향이 계속 달라지는 느낌. 그러나 긍정적인 방향의 맛과 향은 아니었다.
사케 좋아하는 사람들과 한 병 사서 온도 별로 비교해보고, 이것저것 얘기하며 마셔보고 싶은 흥미로운 술이었으나... 맛만 놓고 보면 솔직히 내 취향이 아니었고 뭐랑 어울릴지도 잘 그려지지 않았다.
빈 속에 너무 안 마셔본 술만 도전을 해서 그런지 좀 힘들었다. 심지어 4개 중 3개가 내 취향이 아니어서... 아는 맛, 내가 좋아하는 맛이 응급으로 필요했다.
그렇지만 오늘 같은 특별한 날, 너무 또 아는 맛은 아쉬우니까(ㅠㅠ이것도 병인 듯) 아는 브랜드에서 새로운 술을 마셔보는 것으로 타협하여 고른 시노미네.
시노미네는 3종 정도 마셔본 것 같은데 여지껏 한 번도 실패한 적 없어서 항상 믿고 마시는 편이다.
이 친구도 맛있었다. 팡팡 터지는 향까진 아닌, 절제된 향이지만 맛보면 청포도스러운 향과 단맛이 입 안에 퍼진 뒤 깔끔하게 끝난다. 좋았다. 역시 믿고 마시는 시노미네.
맛있어서 홀라당 비워버리는 바람에 디테일하게 적진 못 했지만 다음엔 보틀을 사서 제대로 마셔보려고 한다.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짤막 사케 상식~
사케는 술을 짜낼 때, 술이 나오는 순서에 따라 아라바시리, 나카도리, 세메 라고 부른다.
가장 밸런스가 좋은 비싼 술이 중간 부분인 나카도리なかどり이기 때문에 이 부분을 사용한 술은 꽤나 고급으로 인정받으며, 사케 이름 뒤에 자주 붙어 있다. 그러니 나카도리 = 좋은 거 정도로만 기억해두면 사케 고를 때 편리하다.
시노미네를 양조하는 치요 주조는 나카도리만 담아서 “시노미네”로 판매하고, 아라바시리와 세메를 블렌딩해 “치요”라는 지역 브랜드로 출품한다고 한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치요도 마셔보고 싶다.
사카비토에 일하시는 일본인 직원분께 추천받아 도전한 츠시마야의 오마치 매니아. 세번째로 소개했었던 라벨 예쁜 술 만든 바로 그 양조장이다. 오카야마 산 오마치를 사용했고, 오마치를 좋아하는 양조가들과 애주가들을 향한 애정을 담아 오마치 매니아라고 이름지었다고 한다.
얼마 전 리뷰했던 카모니시키도 오마치였었는데. 안 그래도 요즘 오마치로 만든 술이 좋아지던 차였기에 딱 나 먹으라고 나온 술이구나~~ 싶어서 바로 주문했다. 사실 이 때부터는 조금 알코올이 올라와서 리뷰가 짧은데 오마치 매니아에 대한 리뷰는 특히 성의가 없고 짧다.
농축 그 자체, 미쳤네 라고만 적어뒀더라.
진희랑 "맛있다 맛있다"를 외쳐가며 서로 등 뚜들기면서 마셨다. 이 날 원래 술 살 생각은 없는데 오마치 매니아는 안 살 수가 없는 맛이어서 바로 샀다. 이 정도면 말 다했죠?
같은 양조장에서 만든 술인데, 독일 효모 사케랑 이렇게 맛이 다를 일인지. 양조장의 한 가지 술이 맛없다고 해서 다른 술이 맛없으리라는 보장도 없구나. 싶었다.
이 후로는 계속 추천받아가며 마셨다.
다음으로 추천받은 술은 다이나가와 양조장의 “텐카” 시리즈.
라벨에 스시가 그려져있길래, 아 스시랑 먹으라는 것이구나 라고 생각했는데,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양조장 대표를 비롯해 누구나 좋아하는 최고급 마구로 스시를 라벨에 그려, 이 제품이 다이나가와의 최고급 제품이라는 것을 표현했다고.
에? 의식의 흐름이... 그렇게 전게된다고? 아무도 그렇게 생각 안 할 것 같은데
디자인은 뭐 그렇다치고... 수입사 소개글에 따르면 스시 라벨이 다이나가와 양조장의 4번 타자 급의 프리미엄 사케라는데
오. 라벨은 별로인데 엄청 맛있다!!
그야말로 쥬시함 그 자체. 매끄러운 질감도 훌륭했다. 시음기록을 찾아보니 “존맛. 쥬시 그 자체.” 라고만 딸랑 적어뒀다. 이상한 라벨로 기대감을 죽이고 맛을 돋보이려는 디자이너의 의도였다면 확실히 성공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하트라벨 이 친구도 맛있다고 한다. 하트를 그린 이유는 텐카 브랜드의 가장 중심적인 의미라는 뜻이라고.
아 예... 설명을 읽어야만 의미를 깨달을 수 있는 특유의 디자인이 좀 아쉬웠지만 맛은 좋았으니까.
넘어가도록 하자.
사실 스시 라벨까지 마시고 코인은 다 떨어졌는데, 별로 기대하지 않았던 스시 사케가 좋았던 관계로 기분이 들떠서 추가로 코인을 구입했다.
9, 10월 사카비토에서 판매율 1위라는 마노츠루 다이긴죠. 종이를 찢어서 붙인 것 같은 라벨과 붓글씨가 멋지다.
마노츠루는 세계 농업유산으로 등재된 니가타의 사도 섬에 위치한 양조장으로, 친환경 비료로 재배한 쌀을 사용하는 것이 특징이라고 한다.
맛있다. 괜히 1위가 아니구나- 싶은 맛. 주도가 +3으로, 야야카라구치(약간 드라이한 맛) 계열로 분류된다고 하는데, 나마자케인데다가 바디감이 풍부해서인지 달게 느껴졌다. 함께 마신 진희는 드라이하게 느껴졌다고.
달큰한 쌀맛과 은은한 프루티함이 잘 어우러진 맛인데 감칠맛도 좋아서 음식이랑 먹으면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이 날 마셨던 여러 술 중 가장 쌀맛이 풍부하게 느껴졌던 술.
같은 브랜드의 초카라구치 버전과 준마이 다이긴죠 버전도 있다던데 다음에 기회가 되면 마셔보는 것으로.
이 날의 마지막 술.
귀양주(키죠슈)인만큼 마지막 술로 딱이지 싶어 골랐다. 귀양주란 사케를 빚을 때 사용하는 물의 일부를 사케로 대체하여 양조한 술을 의미한다. 대체로 진하고 단맛이 많다.
지금까지 4종류의 귀양주를 마셔봤는데 다 취향이었기 때문에 모르는 브랜드였지만 자신있게 주문했다.
역시나 맛있었다.
이 날 마셨던 술 중 단맛이 가장 풍부했는데 캬라멜 맛이 대놓고 느껴져서 정말 신기했다.
엿 같은 (욕 아님) 맛도 나고, 추억의 스카치 캔디 중 녹색 버전의 맛도 느껴진다.
우와 우와 거리다가 한 잔을 홀라당 비워버렸고...
돌아가는 길에 보틀을 주문할 수 밖에 없었다. 술잘알 친구가 놀러오면 디저트로 같이 마셔야지.
빈속에 생수를 안주 삼아 깡술로 보낸 두 시간이었고, 끝나자마자 국밥 갈기러 뛰어갔지만 정말 만족스러운 시간이었다.
평일이고 워낙 멀어서 갈까말까 고민이 많았었는데 아주 제대로 즐겼지 뭐야. 모르는 브랜드의 사케를 많이 알게 된 것도 즐거웠고 한결같은 내 취향을 확실히 알게 된 것 역시 좋았다.
오늘의 리뷰 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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